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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이야기

장옥정, 폐비의 아들은 어떻게 왕이 될 수 있었을까?

by 소금인형2 2013.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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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희의 첫 사극 연기도전과 유아인의 임금역할로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던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가 당초 기대와는 달리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장옥정 역의 김태희에 대한 연기력 논란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등장하였고 여기에 경쟁방송국의 <구가의 서>와 <직장의 신>이 선전을 하면서 장옥정의 시청률은 10%에 미치지 못하는 저조한 성적을 보이고 있습니다.당초 기존의 역사 해석을 뒤집는 참신한 발상으로 사극계에 신선한 충격을 줄 것이라는 기대는 너무 변형되어 버린 인물들의 모습에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거부감을 키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권선징악이라는 뚜렷한 주제를 가진 기존의 사극에 익숙해져 있는 시청자들이 일관성 없이 왔다갔다 하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에 쉽게 빠져들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장옥정이 숙종의 총애를 받기 시작하고 본격적으로 궁중 여인들의 암투가 시작되면서 서서히 공감의 폭을 넗히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인현왕후와 장옥정 사이의 본격적인 대결 구도의 시작은 사람들로 하여금 드라마에 대한 집중도를 높이고 있습니다.여기에 두 여인을 내세운 남인과 서인의 정치게임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모으는데 한 몫을 하고 있습니다.

 

13일 방송된 11회 분에서는 왕의 여자가 된 장옥정이 궁궐로 돌아오고 특별상궁이 되며 신분상승의 꿈을 하나씩 이루기 시작하는 모습이 보여졌습니다. 중전이 된 후에도 혼자서 독수공방을 하던 인현왕후는 어느날 숙종의 부름을 받고 왕의 침전에 들었으나 그곳에서 약조를 지켜줘야 겠다는 숙종의 말을 듣게 됩니다. 옥정을 찾아주겠다는 제안으로 중전자리에 앉게 된 인현왕후에게 숙종이 그 약속을 지키라고 명한 것입니다. 결국 인현왕후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장옥정을 특별상궁에 앉히게 됩니다. 이로써 궁궐안에서의 인현왕후와 장옥정 사이에 피말리는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셈입니다.

 

여기에 평소 인현왕후를 아끼면서 장옥정을 미워하던 대비김씨가 야심한 밤에 장옥정을 끌어내어 회임을 하지 못하게 하는 약을 억지로 먹이는 장면이 연출되었습니다. 대비 김씨는 " 살고 싶으면 마셔라. 네 목숨줄을 구해 줄 약. 대신 회임은 영원히 못할 것이다. 이 약을 마시면 목숨을 구할 것이고 마시지 않으면 내 손에 죽을 것이다." 라고 장옥정을 협박하게 됩니다.아들인 숙종이 장옥정을 사랑하는 것은 어떻게 막을 수는 없지만 미워하는 장옥정에게서 왕의 후사를 보는 것을 막기 위한 대비 김씨의 초강수 였던 것입니다. 대비의 이러한 행동은 인현왕후와 장옥정이 모두 왕의 후사를 낳게 될 경우 그 후사를 둘러싸고 벌어지게 될 권력암투의 피바람이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에 왕실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실제 역사기록으로는 장옥정이 궁에 입궐하게 된 것은 대비 김씨가 죽은지 3년 뒤의 일로 드라마와는 좀 차이가 있습니다.

 

 

드라마 속의 대비 김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훗날 장옥정은 숙종의 아들을 낳게 되며 그 아들이 숙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되는 경종입니다. 경종이 세자에서 왕위에 오르는 그 중간과정에서 어머니인 장옥정은 중전의 자리에 까지 올랐다가 폐위가 되고 다시 사약을 받아 죽게 됩니다. 이처럼 폐비가 되고 사약까지 받은 죄인의 아들이 어떻게 왕위에 오를 수 있었을까요? 

 

숙종은 세명의 정비(중전)와 후궁을 포함해 총 9명의 부인이 있었으며 그 사이에 자녀 6남 2녀를 두게 됩니다. 세명의 정비가 있었지만 불행하게도 정비 소생의 아들은 없었으며 아들들은 모두 후궁 소생이었는데 이중 장옥정(장희빈) 소생의 아들이 숙종의 뒤를 이은 경종이며 숙빈 최씨 - 드라마 동이에서의 동이 - 의 아들이 우리에게는 사도세자 이야기로 잘 알려 진 영조 입니다.경종과 영조는 이복형제 인 셈입니다.

 

 

장옥정이 숙종의 성은을 입어 아들을 낳은 것이 1688년 입니다.이로 인해 특별상궁의 신분이었던 장옥정은 희빈의 첩지를 받게 됩니다. 이 후 인현왕후를 지지하던 서인들이 몰락하고 인현왕후가 폐출되면서 장희빈은 1689년에 중전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그리고 그 다음해에 장옥정이 낳은 아들이 세자에 책봉되게 됩니다. 1694년 서인들이 다시 집권하게 되고 숙종은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고 중전이던 장옥정을 다시 희빈으로 강등시킵니다. 그리고 1701년 인현왕후가 죽게 되는 데 이 죽음에 장옥정이 연루되었다는 상소가 있어 숙종은 장희빈에게 자결을 할 것을 명하면서 사약을 내리게 됩니다.

 

장옥정이 중전으로 있던 시기에는 숙종은 장옥정의 아들에게 무척 애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장옥정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할 때 조선왕조실록에 그 이름이 3,000번이나 거론될 정도로 조선을 유교사회로 만든 1등공신이었던 우암 송시열이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자 그를 유배보냈다가 사약을 내릴 정도로 장옥정의 아들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습니다. 하지만 훗날 복위 되었던 인현왕후의 죽음이 장옥정과 연관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이런 애정은 돌변하게 되었습니다. 숙종은 죽기 전 당시 노론의 수장이었던 신하에게 세자인 장옥정의 아들이 후사가 없고 병약하니 자신의 뒤를 숙빈최씨(동이)의 아들인 연잉군(훗날 영조)에게 맡기라는 부탁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숙종의 바램은 당시 정권을 잡고 있으면서 장옥정의 아들을 지지하던 소론의 대신들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소론의 힘으로 왕이 된 경종도 그리 편안한 재위기간을 누리지는 못했습니다.같은 남인이면서도 숙빈 최씨의 아들을 지지하고 있던 노론은 그가 세자로 있던 시기에도 끊임없이 죄인의 아들이 왕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을 하며 세자자리를 폐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했으며 세자인 장옥정의 아들은 이런 위험에 맞서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했습니다.그리고 왕이 된 이후에도 노론의 힘에 밀려 자신의 이복형제인 연잉군(훗날 영조)를 다음 보위를 이을 세제로 책봉하게 되었으며 심지어 압력에 못이겨 왕세제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왕위에 오른지 4년만에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이처럼 당시의 왕은 붕당정치에 휘둘리며 자신의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없는 처지 였던 것입니다.그리고 이러한 붕당정치는 노론의 지지를 받았던 영조와 소론의 도움을 받던 사도세자와의 갈등으로 까지 이어져 자식을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비참한 결과까지 만들어 낸 것입니다.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는 아마도 장옥정의 죽음까지가 전개되며 그 이후의 과정은 보여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장옥정과 인현왕후로 대표되는 당시의 붕당정치가 두 사람이 죽은 이후에도 경종과 영조, 그리고 사도세자와 정조에 이르기 까지 수십년을 걸쳐 영향을 준 것을 보면 장옥정과 인현왕후의 대결이 단순한 궁중여인들의 시기와 투기에 의한 사건이 아닌 한 때 조선의 역사를 지배했던 중대한 사건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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