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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이야기

동이의 숙종은 왜 장희빈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 주었을까?

by 소금인형2 2010.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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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에서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동이>가 장희빈의 최후를 향해 바쁜 걸음을 내달리고 있습니다.
세자의 고명을 얻기 위해 장희빈과 장희재가 청국에 <등록유초>를 넘기려 했다는 것을 알게 된 숙종은 희빈이 있는 중궁전을 봉쇄하고 이일에 가담한 남인들을 모두 내금위로 압송합니다.그리고 이를 기회로 조정을 장악하고 있는 중신들을 새롭게 일신하려고 합니다. 이를 눈치챈 남인의 수장 오태석이 장희빈과의 관계를 끊으려 하고 장희빈은 더욱 곤경에 빠지게 됩니다. (27일방송 예고분 요약)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이야기는 그동안 수차례 드라마로 만들어져 왔기에 대략적인 내용은 많이들 알고 계실 겁니다.권모술수에 능한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폐위시키고 자신이 중전이 되었으나 후에 모든 것이 밝혀져 결국은 사약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는 <권선징악>을 대표하는 이야길 또 <조강지처>를 버리면 안된다는 교훈의 표본으로 사람들 사이에 널리 인식 되었었습니다.

이렇게 죄인으로서의 비극적인 결말을 맺게되는 장희빈 소생의 아들이 바로 숙종의 뒤를 이어 조선 20대 왕에 오르는 경종입니다.그 뒤에 왕에 오르는 영조와는 이복형제인 셈이죠.
장희빈은 왕비의 자리에서 폐위가 되고 뒤에 사약을 받고 죽게 되는데 어떻게 그녀의 아들이 왕에 오를 수 있었을 까요? 엄밀히 따지면 죄인의 아들인데 말이죠.
장희빈(장옥정)이 숙종의 아들을 낳은 것이 1688년입니다.이로인해 장옥정은 희빈의 첩지를 받게 됩니다.
인현왕후의 지지기반인 서인들이 몰락하고 인현왕후가 폐출되면서 장희빈은 중전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것이1689년 입니다. 그 아들이 세자에 책봉된 것이 1690년 이죠.
1694년 다시 서인들이 집권하게 되고 숙종은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고 장희빈을 다시 희빈으로 강등시킵니다.그리고 1701년 인현왕후가 죽자 이 죽음에 장희빈이 연루 되었다는 상소가 있어 숙종은 장희빈에게 자결할 것을 명합니다.그리고 1720년 숙종이 죽자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이 왕위에 오릅니다.



숙종은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이 다음 왕위를 잇는 것을 탐탁치 않게 생각한 모양입니다.장희빈이 죽고 난 후 1717년에 숙종은 당시 세자인 경종에게 대리청정을 하게 합니다만 숙종이 당시 노론의 이이명에게 세자에게 후사가 없고 병약하니 숙종의 후사는 숙빈최씨(동이)의 아들인 연잉군(후에 영조)에게 맡기라는 부탁을 합니다.당시 조정에는 경종을 옹호하는 소론과 영조를 옹호하는 노론으로 남인 세력이 둘로 나위어져 있었습니다. 숙종이 죽고 경종이 즉위하자 영조를 옹호하던 노론의 압력으로 이복동생인 영조를 세제로 책봉했으며 다시 경종이 병약하니 영조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라는 일종의 압력을 받고 영조에게 대리청정을 시킵니다. 그 뒤 대리청정이 부당하다는 소론의 상소를 받아들여 다시 친정을 하게되고 영조를 옹호하던 노론의 4인방을 유배,사사 하기도 합니다.
경종은 즉위 4년만에 병으로 사망하였는데 여기에는 당시 노론의 후원을 받은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문이 지금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결국 어머니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경종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에 붕당정치가 최고조에 이른 까닭이었습니다.숙종또한 이 당쟁에서 자유롭지 못해 후사를 정하는 일 까지도 서인,남인,노론,소인의 정파에 눈치를 봐야 했던 것입니다.실제로 인현왕후가 폐위되고 장희빈이 중전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과 다시 인현왕후가 복귀되고 장희빈이 자결을 명받은 배경에도 이러한 당파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였습니다.경종 4년 동안에는 그 정도가 더 극심해져서 대리청정과 다시 친정을 반복하는 일까지 발생하게 됩니다.이러한 당쟁은 그 후 영조와 정조대에 이르러 탕평책이라는 어쩔 수 없는 정책을 만들어 내게까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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