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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이야기

목화는 문익점. 역사는 다시 쓰여져야 한다.

by 소금인형2 2010. 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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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빛낸 100인의 위인>이라는 노래에 보면 ~ 목화는 문익점~ 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대한민국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국사 시간에 목화는 고려말 문익점이라는 사람이 원나라에서 붓뚜껍 속에 목화씨를 숨겨 들여와 우리나라에서 재배가 시작되었다고 배웠을 것입니다.
문익점은 고려말 문신으로 고려 공민왕때의 사람입니다.공민왕은 아시다시피 왕에 오르면서 원나라에 친한 신하들을 숙청하면서 배원정책을 폅니다.이로인해 고려와 원 사이는 급격히 악화되었고 급기야 원나라는 공민왕을 폐위하고 충선왕의 세째아들인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봉합니다.(이것은 외교상 절차이지 실제 공민왕이 왕위에서 물러나지는 않았습니다.) 공민왕은 원나라의 정세를 살피기 위해 여러차례 사신을 파견하는데 원나라에서는 이 사신들을 계속 억류하여 고려로 돌려 보내지 않았습니다.
                                                         <문익점 선생 영정>출처 ENCYBER.COM

문익점도 이 사신에 포함되어 있었으며 원나라에 갔다가 원의 황제에게 덕흥군의 고려왕 책봉이 정당하지 않다고 고언했다가 중국의 남부지방으로 유배를 가게 됩니다.이 유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바로 목화씨를 몸에 숨겨 고려로 돌아 왔다는 것입니다.

오늘(7월17일) 부여 능산리 절터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국립부여박물관은 유물을 정리하던 중 폭
2cm,길이 12cm의 직물이 바로 목화를 원료로 하는 면직물 임을 확인했다고 밝혔습니다.그것도 고대의 일반 직물 제조법과는 달리 강한 꼬임을 사용한 직조방식으로 중국에서도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방식이라고 합니다.이 천조각이 발견된 곳에서는 서기 567년 백제 창왕때 제조된 <창왕명사리감>이 발견됨으로써 문익점의 목화보다 적어도 800년은 앞선 것이라는 것이 박물관측의 발표입니다.이렇게 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다시 쓰여져야 합니다.
                                                                                                     <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된 면직물 조각>

실제로 문익점의 <붓뚜껍 목화씨>이야기는 문익점이 목화재배를 장려해 그 덕을 본 많은 사람들에 의해 많은 부분 미화되었다는 것이 사학계 일부에서 제기되어 왔던 것입니다. 또 특별히 목화를 수출을 금하는 금수품 목록에 포함시켰다는 기록도 없고 더군다나 멸망기에 있던 원나라에서 목화유출을 그렇게 철저히 막을 수 있었을 지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의구심을 제기했습니다.

문익점이 목화씨를 처음 들여왔던 그렇지 않던 문익점의 목화 재배 이후 우리나라 의복생활은 커다란 변화를 맞게 됩니다. 포그한 솜과 땀을 잘 흡수하는 무명옷감을 사용할 수 있게 되어 백성들의 생활이 보다 윤택해 지게 되는 것입니다. 솜은 추위를 막아줄 의복과 이불에 사용되었으며 목화로 만든 무명실은 튼튼하여 노끈,낚시줄,그물등으로 사용되게 됩니다.
한발 더 나아가 무명은 조선시대에 물물교환의 척도가 되는 화폐의 수단으로,나라에 바칠 세금의 단위로 사용되었으며 일본이나 중국과의 무역에서 수출품으로 사용되어 조선 중기 이후의 나라살림을 부강하게 하는 데 일조를 하게 됩니다.

                             <목화에서 실을 뽑는 물레>    출처:엔사이버닷컴

이번 부여박물관에서 발표한 내용이 사실로 확인되어서 비록 최초로 목화를 들여온 사람의 이름이 문익점 이라는 역사는 다시 쓰여지게 되더라도 문익점이 목화를 재배,보급함으로써 백성들의 삶을 보다 윤택하게 했다는 내용은 그대로 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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